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토쿠 태자 (문단 편집) == 저주 == 의외일 수도 있는데, 이 사람도 [[저주]] 논란이 있다. 6세기 야마토 조정이 제도의 한계에 부딪히자 7세기에 [[율령제]]를 도입함으로써 해결해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여기서 쇼토쿠 태자와 소가씨가 적극적으로 율령제를 도입했는데, 정치권력 분쟁으로 645년 [[을사의 변]]이 일어나 [[소가]]씨가 몰락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쇼토쿠 태자는 이상할 정도로 찬양받고 소가씨는 이상할 정도로 매도된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들이 주도한 율령제를 보면 [[중앙집권제]]가 목적이었는데, 기존 호족들과 기득권 귀족들의 눈에 과연 쇼토쿠 태자가 좋게 보였을리는 없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 [[소가노 이루카]]는 재앙을 내리는 귀신으로 두려움을 샀다. [[사이메이 덴노]]가 죽기 직전 나타난 귀신이 소가노 이루카라고 여겼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죽기 직전 그의 사저에 내리친 낙뢰는 그가 내린 신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대 일본에서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과 저주와 재앙을 내리는 귀신은 표리일체의 존재였다. 그가 신성화되었음은 역으로 그가 두려운 귀신으로 간주되었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쇼토쿠 태자의 저주 설은 이렇다. 호류사와 간교사라는 유서 깊은 절들에게서 쇼토쿠 태자는 동자의 모습으로 제사를 받는 경우가 많다. 동자는 귀신을 퇴치하는 힘이 있으면서 거친 귀신의 속성도 같이 지녔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서기에서 쇼토쿠 태자는 귀신을 연상시키게 하는 부분이 있다. [[소가노 우마코]]와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불교 도입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일 적 578년 7월 소가노 우마코는 쇼토쿠 태자 일행과 함께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자택을 공격했다. 모리야 세력이 격렬히 저항해서 좀처럼 쳐부술 수 없었는데, 이때 쇼토쿠 태자가 승리를 기원하자 무너졌다고 한다. 이때 일본서기는 그의 머리 형태가 히사고바나라고 특기하였는데, 이는 동자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무리로 덤벼도 이길 수 없던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동자, 즉 귀신의 저주로 무찔렀다는 것이다. 거기다 [[일본 황실]]에서 저주와 연관된 자들은 많다. [[진무 덴노]]는 야마토로 동진하다 좀처럼 못 이기자 꿈에서 신들에게 들은 조언으로 이겼다고 하는데, 이 방법이 영락없는 저주다. 고대 일본의 원령숭배사상에서 강력한 원령은 신이기도 했다. [[스진 덴노]]도 저주로 인해 나라가 초토화되어 신들의 신주를 옮겼다고 하며, [[오진 덴노]]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 [[진구 황후]]가 야마토로 가지 못하자 모종의 주술적인 행위로 야마토로 돌아갔다고 나온다. 후대의 이야기지만 후지와라 4형제에게 억울하게 주살당했다고 정사에조차 명시된 나가야 왕도 사후 저주를 내려 4형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간무 덴노]] 치세 나카오카쿄 시절 후지와라 씨족에게 주살당한 사와라 친왕 사후 재앙이 발생하자 사와라 친왕 저주 소문이 돌자 [[간무 덴노]]가 사와라 친왕을 스도 덴노로 추존하기도 했다. [[스토쿠 덴노]]로 가면 원령신의 정점을 보여준다. 중세 시절 일본 왕의 깃발이 전장에 나타나자 적들이 두려워서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다. 일본 황실이 신의 자손으로 여겨졌다는 시점에서 저주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흔히들 생각하는 신격화도 있지만, 일본의 원령 사상을 보면 알다시피 저주를 내리는 귀신이 곧 신이었다. 역으로 일본 왕실이 저주, 재앙과 관련이 깊었기에 신=재앙을 내리는 무서운 귀신으로서 여겨져 저주받기 싫어서 아무도 안 건드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호류사 유메도노(夢殿 몽전)의 본존인 구세관음보살입상(救世観音菩薩立像)은 호류사에 안치되어 아무도 볼 수 없는 비불(秘佛)이었다. 심지어 호류사 주지조차도 구세관음상을 볼 수 없었다. 1884년(또는 1886년)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고 미국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와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본명은 오카쿠라 카쿠조(岡倉覚三))이 방문했을 때 이 비불은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쐬었다. 비불을 열어 바깥에 드러나게 하면 천변지이가 벌어진다며 승려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도망치는 모습을 본 뒤에야 두 사람은 비불을 모신 단의 문을 열었다. 내용물은 미라처럼 450미터 남짓한 긴 천으로 둘둘 말린 채였는데, 천을 벗기는 것조차도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이 첫을 다 벗기자 비로소 구세관음의 온전한 형상이 드러났다. 우메하라는 쇼토쿠 태자의 등신불이라는 구세관음의 후두부에 주목했는데, 광배가 두드려 박혔기 때문이다. 이는 길이 15 cm나 되는 대형 못으로 주로 저주에 사용한다. 이는 쇼토쿠 태자에게 저주의 대못이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호류사는 역대 후지와라 씨족들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나가 그들을 저주하는 원령들을 모시고 자신들이 어려울 때 성대히 제사를 지내서 진정시키려는 의미가 더 컸다. 쇼토쿠 태자를 신격화했음은 역으로 그가 내릴지 모르는 재앙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쇼토쿠 태자의 행보를 보면 야마토의 기득권층과 충동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태자의 죽음에서 미심쩍은 것이 있었고 생전에 저주, 주술과도 관련이 깊던 그가 사후 모종의 일로 인해 동자의 모습으로 저주를 내리는 귀신으로 두려움을 사서 신격화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